금루옥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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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1-05 15:0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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옥의는 2498매의 옥편을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것으로 길이가 1.88m나 된다된다. 1968년에 허베이성[河北省] 만성한묘(滿城漢墓)의 관(棺) 속에서 발견된 중산정왕부처(中山靖王夫妻)의 것이 유명하다. 전한시대(前漢時代)에는 아직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뿐만 아니라 제후왕(諸侯王)도 사용하였으나, 후한시대에는 황제에게만 제한되었다.금루옥의에 대한 글입니다. china(중국) 사람들은 유독 옥을 좋아했고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. 전진(前秦)의 [열자(列子)]에 주나라 목왕대에 서방정토에 사람이 왔기 때문에 중천에 누대를 짓고 매일 옥의를 바치고 옥식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옥으로 만든 음식이 없듯 실재로 믿기 어렵다. 한반도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성립한 낙랑의 발굴data(資料) 중 죽은자의 뚫린 구멍을 틀어막는 장옥이 출토되었는데 낙랑이 한의 사군이므로 china(중국) 의 옥과 관련된 data(資料)라 볼 수 있다
옥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한나라 이후의 문헌이다.금루옥의 , 금루옥의생활전문레포트 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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금루옥의에 대한 글입니다. 전체가 얇은 옥편(玉片)으로 되어 있는데 옥편의 네 귀퉁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, 철사 모양의 금실로 꿰어 묶었다. 위시대(魏時代)가 되자 문제(文帝)가 박장령(薄葬令)을 내려 옥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에 위·진(晉) 이후에는 옥의를 볼 수 없게 되었다.
금루옥의(金褸玉衣), 말그대로 옥을 금실을 이용해서 꿰어 만든 옷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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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hina(중국) 한대(漢代)에 황제와 고급귀족을 매장할 때 온몸을 완전히 쌌던 장복(葬服). 옥갑(玉匣)·옥합이라고도 하였다.
[한서] 곽광전에 그가 죽었을때 조정에서 하사 받은 하사품을 열거하고 있는데 옥의가 등장하여 문헌상 최초라 볼 수 있다
한서의 주석을 작성한 당나라의 안사고(584-684)는 옥의에 대해 [한의주]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슬을 가지고 저고리를…(투비컨티뉴드 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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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 문헌에 의하면, 전국시대에는 옥의의 전신인 인시(鱗施)라는 것이 있었는데 한대에 옥의를 사용하면 유체(遺體)를 보존할 수 있다는 미신이 생겨, 그 이후부터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.
천자의 인장을 옥새라 했으며 천자의 말을 옥음이라하였다.